2011/03/29
나는 요즘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
나는 한때
어떤 적의가 나를 키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크기 위해 부지런히
싸울 상대를 만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 그때는 애인조차 원수 삼았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솔직히 말해서 먹고 살만해지니까
원수 삼던 세상의 졸렬한 인간들이 우스워지고
더러 측은해지기도 하면서
나는 화해했다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더 크고 싶었으므로
대신 술이라도 원수 삼기로 했었다
요컨대 애들은 싸워야 큰다니까
내가 이를 갈면서
원수의 술을 마시고 씹고 토해내는 동안
세상은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었고
책들은 늘어나거나 불태워졌으며
머리는 텅 비고 시는 시시해지고
어느 볼장 다 본,
고요하고 섬세한 새벽
나는 결국 술과도 화해해야 했다
이제는 더 크고 싶지 않은 나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나는 득도한 것일까
화해, 나는 용서의 다른 표현이라고 강변하지만
비겁한 타협이라고 굴복이라고
개량주의라고 몰아 붙여도 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것이다
적이 없는 생애는 쓸쓸히 시들어간다
고요하고 섬세하게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