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 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문예중앙> 2011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