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악산 정수리에 서 있는 글자가 없는 비석 하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크고 많은 생 담고 있는 나머지
점 하나 획 한 줄도 새길 수 없었던 것은 아닌지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씀을 지녀
입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일 다 부질없으므로
무량무위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저리 덤덤하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것을
저렇게 밋밋하게 그냥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 시집 『도둑 산길』(책만드는집,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