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난 후
나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제2악장에 갇혀 지냈다
종일 테이프 위를 걷기도 했지만 언제나
갔던 길을 되돌아 올 뿐이었다
이따금 길에서 만난
달의 처연함을 비웃는 일도
나무들의 우직함을 흉보는 일도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듯 했다
마땅히 져야 할 곳을 찾지 못해
내 몸 어딘가를 서성이는 달이
나무들의 검푸른 잎사귀 아래
투명한 그림자를 피워대는 것도
나는 굳이 간섭하지 않았다
막연히 연애를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
주위엔 매화나무만 무성했다
누군가 내 이마를 쳐서
그것도 아주 세게 쳐서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무병을 앓고 싶어
매화나무 위에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