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란 틈, 지상의 모든 빈자리를
비집고 올라오는 이것.
그대를 깜박 놓친 어느 저녁의 틈새에도
내 안의 어딘가로 잠적해버린 오랜 시간들에도
풀은 벌써 무성하게 올라와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에게도 굴하지 않고 틈을 매우는
저 무서운 망각의 혼령들.


아침 명상의 언저리를 날아오르는 새들이나
저녁 강 위의 산 그림자를 위해서
그리고 내 안의 빈자리를 위해서도
풀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풀을 뽑으면 뽑을수록
풀의 죽음이 당연하면 당연할수록
언젠가부터 서서히 풀의 죽음이 부담스러워졌다.
아니, 지금껏 지켜온 나의 영역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비는 내려와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흐르고
바람은 미련 없이 스쳐 지나가는데
아직도 내 안에 갇혀있는 오래된 시간들
무엇인가를 고집하는 일은 우울하다.
차라리 틈이란 틈, 지상의 모든
그리움의 빈자리를 비집고 올라오는
저 풀들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을 생각한다.
내가 만든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