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말 원주의 토지문화관에서 1박2일 일정으로 열렸던, 김현 선생의 10주기 기념 문학 심포지움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밤의 시간은 말 그대로 '바쿠스 축제'였다. '김현 추억의 밤'이라 이름붙여졌던 그 자리에서, 김현 선생의 친구·후배·제자들이 털어놓는 기억의 태반은 술과 얽혀 있는 사연이었고, 그 덕분에 참석자들 역시 자연스럽게 술의 세계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술에 가득 젖어 있자니, 어느 순간엔 김현 선생이 바로 옆자리에서 유쾌하게 이야기의 술잔을 들이켜며 싱긋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전의 김현 선생은 정말이지 술자리를 사랑했었다. "술자리의 분위기를 지워버린 나의 삶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글에 썼을 정도로 그랬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선생을 처음 뵙고 마지막 병상에서 운명을 목격하기까지, 한결같이 그랬다. 몸이 아파 술을 입에 대지 못하던 때가 더러 있었지만, 그런 때도 술자리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지 못해 당신 대신 술을 마시라고 술값을 건네주곤 했을 정도였다. 선생은 술자리에서 사람은 만나고 이해하고 정을 나누고 함께 일을 했으며, 또 가르치고 배웠다.
그 세례를 받고 생활한 '우리' 역시 교실보다도 술자리에서의 선생을 통해 더 많은 지식과 깨우침을 얻었다. 선생의 말처럼 술이 풀어내는 언어는 "불꽃의 말"이기 때문일까, 그 불꽃으로 우리 몸마저 태웠기 때문일까, 희한하게도 그 깨우침은 육화된 '그 무엇'으로 다가와 우리가 갈 길을 이끌었다. 이것이 나 혼자만의 고백만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수긍하는 체험이니, 돌이켜보면 선생의 어떤 힘이 술에 그런 마법의 약을 풀어 넣었었는지 신기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선생이 연출한 술자리는 정녕 어떤 분위기였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이번 '추억의 밤'에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된 것이지만, 술자리에서의 김현 선생은 무엇보다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 너그러웠다. 제자된 입장에서 기억하자면, 학생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하는 적이 없는 선생은 학생이 무얼 하고자 원하는지를 알고 싶을 때면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우리 입에서 맨정신으로는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말들이 술에 덥혀져 숨결처럼 흘러나오기까지, 선생은 특유의 부드러운 어투와 재미있는 이야기로 외곽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우리는 마침내 되는 소리 안되는 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는데, 그러면 선생은 그 빗나가기 일쑤인 언어를 우리 속이 뻥 뚫릴 때까지 한없이 들어주었다(곰곰 되새겨보건대, 그 빗나가는 언어들이야말로 실은 문학의 씨앗이 아니겠는가).
그처럼 선생은 술자리에서도 인내의 천재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제 관계의 어떤 관습적 벽이 허물어졌구나 느낄 때 쯤에 이르면, 벌써 우리의 숨은 욕망을 읽어낸 선생은 그 욕망의 길을 가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가다듬어 주었다고 했지만, 선생은 술에 취해서도 맞다 틀리다 식의 O× 표를 치는 법이 없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에겐 자신에 적합한 길이 있다고 믿은 사람이 선생이었다. 논문을 쓰는 친구에게나 소설을 쓰는 친구에게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자신의 솔직한 경험담을 통해, 그러그러한 경우엔 이런 책을 읽어보라는 식의 최소한의--그러나 언제나 핵심을 찌르는-- 조언을 통해, 우리가 갈 길을 가리켰다.
 '스승'으로서의 그런 마음씀이 70년대와 80년대에 어떤 의미를 지녔던 것인가는, 안팎으로 지극히 권위주의적이었던 그 시대에 대학을 통과해온 사람들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선생과의 술자리가 무턱대고 방만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술을 핑계로 "서로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큰소리를 질러대는 자리나 공연히 처연한 몸짓으로 즐겁게 말을 못하게 만드는 자리"를, 선생이 지극히 싫어했던 까닭이다. 선생은 술자리가 무엇보다 더불어 나누는 자리, 즐거운 축제의 자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취중에도 작은 양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처럼 선생은 또한, 술자리에서도 절제의 천재였던 것이다.
물론 그 절제란 것은 규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저절로 우리 속으로 스며드는 어떤 공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선생과 술자리를 할 때처럼, 아무리 술을 마셔도 흐트러지지 않으면서 자유롭고, 즐거우면서도 풍요로왔던 체험을 달리 찾을 수 없다(선생의 사후 10년이 지나도록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으므로, 지나친 과장이라고 여기지 마시길!). 자신을 배우로 내세우지 않는 선생은 그러나 그 술자리를 이끄는 탁월한 연출가였다. 그러고보니까, 선생은 다른 무엇이기보다도 술 그 자체의 천재, 그런즉 삶 그 자체의 천재였던가보다.


  * 이 글은 서울대 <<대학신문>>(2006. 5월 8일자)의 '김현 10주기 특집'을 위해 쓰여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