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도 이런 얼굴 있지 않을까

 

승천하지 못한 빗물, 검게 얼룩진 바닥 위로 기어가는

곰팡이와 이끼, 먼지를 겹입어 더 이상 투명하지 않은

유리 조각, 낡은 타이어 두어 개, 녹슨 안테나, 뒤엉킨 전깃줄

 

날아오를 수도 달릴 수도 없는

무엇을 비출 수도 키울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그런 소도구들 속에서 중얼거려 보는

쓸쓸한 무대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러나 보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또 하나의 얼굴

또 하나의 옥상

수없이 너의 곁을 지나쳤지만

나는 오늘 처음으로 너를 본다

너무 오래 웅크린 소도구들 속에서

한 가지 흔들리는 것도 본다

 

날아온 한 줌 흙 속의 강아지풀

하늘로 하늘하늘거리고

강아지풀만큼 하늘에 가까워진 네 얼굴을

나는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