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이 위기가 아니었을 때
나는 시를 생각지 않아도 잘 견뎠다
시는 커녕, 어떤 것도 가치있게 나를 자극하지는 못했다
그냥 적당히 연명하는 슬기를 익혔다
그러나 늦은 밤 잠자리에 들면
오늘 하루도 또 이렇게 살아냈구나 하는
안도감과 전율로 몸서리쳐진 알 수 없는 배반감
그랬었다 끊임없이
자학도 자위도 아닌 것들에 끌려 여행을 다녔다
동해바다, 그 쓰디쓴 유년의 감옥 안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세상과 보다 잘 섞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잠시 정착한 곳은 늘 무인도였다
왜였을까,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의 참혹한 허무를 지레 겁내고
감당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웃음이 날만큼 언제나 나는 비겁의 맨 앞줄에서 서성댔다
어떻게 하면 혼자라는 것을 덜 수 있을까 궁리 끝에
다시 시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시는 나를 어찌하였던가
지금까진 위태위태한 스탭이었으나
그러나 아직은 기막힌 사랑 한 편, 쓸만한 시 한 소절의 희망이
유효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리라
시를 시작하면서 만난 몇몇 체험들
그들에게서 받은 위로가 적지 않다
더욱 부끄럽고 더욱 아파서 살아 있는 일이 죄가 아니었음 좋겠다
이제는 나를 인정하고 싶기도 하고
내 의식이 얕아지는 걸 더는 방관할 수만은 없기에
 
 

 

'99년 이른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