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 왔어요. 눈 한번 떠보세요”
조금 더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몸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멍 자국에 꽂혀 있는 링거를 통해 항생제와 포도당을 천천히 빨아들일 뿐 반응이 없었다.
엄지와 검지로 집게를 만들어 눈꺼풀을 벌려보았다.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혈압, 호흡, 산소포화도를 나타내주는 수치와 그래프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래프 모양이 흡사 파도 너울 같기도 했고, 산 모양 같기도 했다. 어머니 몸이 그리는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머니 생명이 파도와 산을 넘어 서서히 떠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할머니 또 저런다!”
옆 침대에 누워 있는 할머니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링거 꽂힌 손으로 가리킨 건너편 침대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한 분이 쪼그리고 앉아 한 손에 손거울을 들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빗질해주고 있었다. 치매에 걸려서 그렇다고 하며 옆 침대 할머니가 돌아누웠다. 건너편 할머니가 빗으로 거울 긁는 소리를 내면 옆 침대 할머니가 쯔쯔쯔, 혀 차는 소리로 추임새를 넣었다. 어머니의 부은 팔을 주무르다가 사람이 늙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감상이 일어 병실을 나섰다.

푸르렀음으로 붉어질 자격이 있는 나뭇잎이, 매달려 있었음으로 떨어질 자격이 있는 나뭇잎이 길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도 나뭇잎과의 추억을 접을 뿐 바람에 뒹구는 낙엽을 붙잡지는 않았다. 나는 낯선 도시, 낯선 길, 낯선 병원 앞을 천천히 오갔다. 
<나의 여집합인 나>. 아버지 죽음을 겪고 썼던, 까마득히 잊고 있던 시 제목 하나가 떠올랐다. 이십 년 전에, 제목부터 너무 관념적이란 친구들 평을 받고 찢어버린 시가 어떻게 갑자기 기억을 헤집고 나온 것일까. 슬픔에 젖은 정서가 세월을 넘어 슬픔에 젖었던 세월에 구멍을 뚫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슬픔과 슬픔 사이에는 항시 맞뚜레가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가 죽고
내가 슬퍼서 운 것은
아버지 속의 내가 죽으며 운 것
내 속에 살아 있는 아버지가 운 것

 

4행까지 쉽게 떠오른 시는 중간 두세 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 몇 줄은 정확하지 않게 가물가물 이어졌다.

 

내가 죽으면 나는 하나도 안 죽고
내 속에 살아 있던 사람들만 죽네
내 속에 나는 없네
나는 내 밖에만 있네
내가 죽으면 내 바깥의 나는 울고
내 속의 다른 사람들은 울지 못하네
나는 나의 여집합이네

 

나는 병원에서 나오고 있는 할머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림잡아봐도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이 누군가의 부축도 없이 잘 걸었다.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그간의 내 삶이 어머니를 세월 앞으로 밀었구나 싶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늘 내가 되어 있었고 나는 어머니가 되어 있지 못했음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다시 병실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삼 일 동안 의식이 없었다. 가족들이 병원 근처에 잡아놓은 여관방으로 모였다. 얼굴과 입술 빛이 새까맣게 변한 게 이번엔 돌아가실 것 같으니까 맘 준비들 하라고 매형이 말했다. 허리 뒤에 손을 넣어보았는데 침대에 착 붙은 게 틀렸다며 막내 누이가 동조했다.  척추에 금 가 애비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몇 달 만이라도… 작은 형수가 말끝을 흐렸다. 상주가 너 하나니까 미리 잠 좀 자두라던 둘째 누이가 흰 와이셔츠를 내밀며 사이즈가 백호 맞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를 고향 쪽 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결정에 따라 일부는 큰일 치를 준비를 하러 떠나고 일부는 남았다.

다음 날, 환자 이송 앰뷸런스가 예상보다 일찍 왔다. 나는 병원 옆 편의점에서 충전이 덜 된 휴대폰을 찾고 병원 원무과에 물어 환자 이송 허가증을 발부받았다.

둘째 누이와 내가 앰뷸런스에 동승했다. 응급구조사가 서둘러 어머니 코에 산소를 연결했다. 머릿속에서 ‘산소코뚜레’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차가 출발했다. 응급구조사가 엄밀히 따지면 혈압이 너무 낮아 이송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며 도중 안 좋은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큰 누이에게 출발했다고 전화를 하니, 이곳 병원에 문제가 생겨서 그렇다며 일단 집으로 오라고 했다. 누이 집 주소를 불러주자 운전자가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가망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찬송가 부르면서 어머니 편하게 모셔드리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가족 의견 중 하나가 떠올랐다. 운전석 쪽으로 난 작은 유리창을 통해 간간이 보이는 산은 단풍이 들어 피처럼 붉었다. 앰뷸런스 소리는 소리의 단풍이다, 라는 문장이 머리에 써졌다. 나는 산소가 공급되고 있는 압력 게이지를 주시했고 응급구조사는 숨을 점검하는지 어머니 코에 손가락을 가끔 갖다가 대어보았다. 더스틴 호프만이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서 죽는 <미드나잇 카우보이>란 영화 장면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따지고보니 나도 산소 코뚜레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처럼 유선이 아닌 무선의 산소 코뚜레. 또 입과 내장과 항문이 맞뚫려 있고 그 사이를 음식물들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음식물 코뚜레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입에서 항문으로 통과하는 음식물들 중 바로 통과하지 못한 찌꺼기들이 머물러 있는 게 육체가 아닌가. 그 육체가 산소와 음식물들의 코뚜레를 벗는 날 우린 죽음을 맞게 된다.
죽음. 그 위대한 스승. 내가 살며 받은 최고의 교육은 면전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죽음이다. 그 명강의를 이수하고도 어머니의 죽음 맞기는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시간 반을 달려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데.”
차가 비포장길로 접어들어 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말하며 흔들리는 어머니를 붙들었다. 당황해 운전석 쪽으로 난 창을 주시하자 멀리 누이 집이 나타났다. 응급구조사가 구조차량 내비게이션은 무조건 최단 거리 길로 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차가 덜컹거리고 어머니가 인상을 쓰는 듯했다.
“아구 아구 아파!”

누이 집에 도착해 침대에 어머니를 내려놓을 때였다. 낯익은 목소리지만 낯설게 들려온 소리는 분명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다들 놀라고 있을 때 어머니가 눈을 슬쩍 떴다. 산길을 넘어오며 등에 난 욕창에 자극을 받아서였을까집에 모여 있던 가족들이 모두 어리둥절했다.
“뭐하냐. 빨리 가서 앰뷸런스 잡아. 의료원이 가까우니까 그리로 모셔. 바로 뒤따라갈게.”
누이와 매형의 말을 듣는 순간 막막하던 가슴이 환하게 뚫리며 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신발을 꺾어 신은 채 앰뷸런스 쪽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