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16
누에가 안방을 가져갔다
뒹굴며 숙제하기에 좋았던 마루는
뽕잎을 썰거나 다듬는 장소로 적당했고
우리는 광을 고친 방에서
둥근 잠을 자며 둥근 꿈을 꾸었다
누에가 가져다줄
모나미 연필 한 다스와 새 가방이
누나 입가에서도 웃고 있었다
잠꼬대를 하기에도 턱없이 비좁은 방이었지만
갓 따온 뽕잎에 엎드린 누에처럼
여덟 식구 모두 싱싱한 잠을 잤다
막내의 그림일기장에 그려진 통통한 누에는
겨우 연필로 뭉개진 뽕잎을 먹어야 했다
청소 시간에 주운 초록색 크레파스를 내밀던 날,
막내는 그것을 받자마자 그림 일기를 썼다
큰누나는 훔친 것이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지만
내 뒤통수를 측은해했다
누에는 실을 토하기도 전에 안방을 비워주었다
누에구더기 때문이라 말했다 아버지는
누에섶에 불을 질러
우리들의 꿈도 함께 태워주셨다
그날 밤, 만취한 아버지는 누운 채로
명주실을 밤새 토해냈다
둥글고 거대한 고치 하나가
다음날 오후까지 이불에 덮여 있었다
막내는 더이상
그림일기장에 누에를 그려넣지 않았다